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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1필사37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중에서 상태가 상당히 심각해지자, 나는 카드점 치는 사람을 찾아가 상담을 받고 싶어졌다. 그것만이 내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줄 것 같았다… 한 여자 점쟁이의 주소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는 동안, 지난달에 A를 생각하며 새 원피스를 고르던 때와 비슷한 희열을 느꼈다. 아직도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점쟁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 사람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예언을 듣게 될까 두려웠다. 나는 ‘내가 그에게로 가면 돼' 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그에게 가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때로, 그 사람이 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게 아닐까 자문해보기도 했다.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태연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하고.. 2024. 9. 12.
박민규, 더블 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도 남은 몇장의 사진 때문이다. 한결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한 장의 결혼사진도, 두어 장의 스냅사진도 모두가 경직된 표정이었다.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그래서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결국 삶이란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는 것인가, 두 분의 사진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오피스텔을 정리하며 뒤적인 나의 사진도 대부분 그런 얼굴이었다. 희, 노, 애, 락을 겪으면서도 인간은 대부분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무표정한 얼굴을 이 땅에 남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바람이 분다.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담담한 모습이겠지만, 더없이 풍만한 감정으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2024. 9. 11.
김중미, 괭이부리말 아이들 중에서 명희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자신에게 물었다. 아직도 좋은 아버지가 되고, 듬직한 형이 되는 것이 작고 보잘것없는 꿈이라고 생각하는지. 아직도 착한 사람으로 사는 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명희는 또 숙제가 밀린 아이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2024. 9. 11.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중에서 나는 이렇게 초저녁에 장사를 막 시작한 술집이 좋다. 실내 공기는 아직 신선하고 깨끗하지, 모든 게 반질반질하지, 바텐더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면서 넥타이는 똑바로 맸는지, 머리는 단정한지 확인해 보고. 바 너머에 가지런히 늘어 놓은 술병도 좋고. 사랑스럽게 반짝거리는 술잔도 좋고. 그때마다 느껴지는 기대감도 좋아. 바텐더가 그날의 첫 잔을 준비해 보송보송한 받침에 내려놓고 옆에 냅킨을 조그맣게 접어 놓아 주는 것도 좋다. 그 술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도 좋아. 조용한 술집에서 그날의 첫 잔을 조용히 마시는 순간... 정말 근사하다니까.   슬픔에 잠긴 한 남자가 카운터 앞의 걸상에 앉아 바턴더에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술잔을 닦으며 이야기를 듣는 바텐더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애쓸 때 흔.. 2024. 9. 5.
김려령, 완득이 중에서 그렇다고 무리해서 찾을 생각은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찾다 힘들면 '못찾겠다, 꾀꼬리'를 외쳐 쉬엄쉬엄 찾고 싶다. 흘려보낸 내 하루들. 대단한 거 하나없는 내인생, 그렇게 대충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작은 하루가 모여 큰 하루가 된다. 평범하지만 단단하고 꽉찬 하루를 꿰어 훗날 근사한 인생 목걸이로 완성할 것이다.    제1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2024. 9. 5.
무라카미 하루키, 반딧불이 중에서 나는 반딧불이가 든 인스턴트커피 병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누군가 걷는 것을 잊어버린 하얀 셔츠가 빨랫줄에 걸려서 무슨 허물처럼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옥상 구석에 있는 녹슨 철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급수탑 위에 섰다. 원통형의 급수 탱크는 낮 동안 듬뿍 빨아들인 열로 아직 따뜻했다. 좁은 공간에 앉아 난간에 기대 있으니 아주 조금 이지러진 흰 달이 눈앞에 떠올랐다. 오른쪽에는 신주쿠 거리가, 왼쪽으로는 이케부쿠로 거리가 보였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선명한 빛의 강이 되어 거리에서 거리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양한 소리들이 뒤섞인 부드러운 신음이 마치 구름처럼 거리 위로 떠올랐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밤의 어두운 물소리뿐이었다. 벽돌로 만든 오래된 수문도 있었.. 2024.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