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2 레이먼드 챈들러, 빅슬립 중에서 10월 중순 어느 날 오전 열한시경, 태양은 보이지 않고 한결 뚜렷해진 언덕들이 폭우를 예고했다. 나는 담청색 양복에 암청색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장식용 손수건을 꽂고, 발목에 암청색 수를 놓은 검은색 모직 양말과 검은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이렇게 깨끗하고 단정한 차림새에 면도까지 한데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으니 누가 좀 알아줬으면 싶었다. 그야말로 말쑥한 사설탐정의 모범답안 아닌가. 사백만 달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교차로에서는 노란 불빛이 깜박거렸다. 나는 차를 돌려 한쪽에 깍아지른 듯한 높은 절벽이 있는 언덕 밑으로 미끄러져 가서 도시간 도로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았다. 낮게 뿔뿔이 흩어진 불빛들이 도로 저 멀리 보였고, 부두 불빛의 반짝임도 도시 위에 떠도는 하늘의 달무리도.. 2024. 12. 12.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중에서 나는 이렇게 초저녁에 장사를 막 시작한 술집이 좋다. 실내 공기는 아직 신선하고 깨끗하지, 모든 게 반질반질하지, 바텐더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면서 넥타이는 똑바로 맸는지, 머리는 단정한지 확인해 보고. 바 너머에 가지런히 늘어 놓은 술병도 좋고. 사랑스럽게 반짝거리는 술잔도 좋고. 그때마다 느껴지는 기대감도 좋아. 바텐더가 그날의 첫 잔을 준비해 보송보송한 받침에 내려놓고 옆에 냅킨을 조그맣게 접어 놓아 주는 것도 좋다. 그 술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도 좋아. 조용한 술집에서 그날의 첫 잔을 조용히 마시는 순간... 정말 근사하다니까. 슬픔에 잠긴 한 남자가 카운터 앞의 걸상에 앉아 바턴더에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술잔을 닦으며 이야기를 듣는 바텐더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애쓸 때 흔.. 2024. 9. 5.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