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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필사20

레이먼드 챈들러, 빅슬립 중에서 10월 중순 어느 날 오전 열한시경, 태양은 보이지 않고 한결 뚜렷해진 언덕들이 폭우를 예고했다. 나는 담청색 양복에 암청색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장식용 손수건을 꽂고, 발목에 암청색 수를 놓은 검은색 모직 양말과 검은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이렇게 깨끗하고 단정한 차림새에 면도까지 한데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으니 누가 좀 알아줬으면 싶었다. 그야말로 말쑥한 사설탐정의 모범답안 아닌가. 사백만 달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교차로에서는 노란 불빛이 깜박거렸다. 나는 차를 돌려 한쪽에 깍아지른 듯한 높은 절벽이 있는 언덕 밑으로 미끄러져 가서 도시간 도로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았다. 낮게 뿔뿔이 흩어진 불빛들이 도로 저 멀리 보였고, 부두 불빛의 반짝임도 도시 위에 떠도는 하늘의 달무리도.. 2024. 12. 12.
한강, 희랍어 시간 중에서 어느 사이 초록불이 켜진다. 복사열이 아직 식지 않은 검은 아스팔트 도로를 가로질러, 그녀는 맞은편 거리를 향해 걷는다. 전광판들은 여전히 소리없이 거대한 화면과 활자들을 흘려보내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침묵하며 달리는 미끈한 승용차,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의 소리없는 웃음이 검은 거리 위로 유령처럼 깜박인다.   그때 왜 그렇게 가슴이 서늘해졌던 걸까, 느리디느린 작별을 고하는 것 같던 그 광경이, 헤아릴 수 없는 무슨 말들로 가득 찬 것 같던 침묵이, 여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마치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대답해주었던 것 처럼, 뼈아픈 축복 같은 대답은 이미 주어졌으니, 어떻게든 그걸 내 힘으로 이해해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시시각.. 2024. 12. 9.
최진영, 유진 중에서 그런 친구는 처음이었다. 원두커피도 오렌지도 처음이었다. 그 방에서, 어둠이 내릴 때까지, 무영과 나는 이상하고 지루한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다. 가끔 꾸는 악몽과 죽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천박한 어른과 한밤의 산책과 가끔 엄습하는 자해 욕구를 말했다. 없애 버리고 싶은 기억과 박제해 두고 싶은 기억을 조금씩 말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말했다. 매일 다른 날씨와 하늘, 구름, 햇살, 장마, 첫눈, 노을, 겨울철 별자리, 바람에 실려 오는 계절 향기. 그리고 마침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리고 매일 유진 언니를 생각했다. 강한 바람이 불어 가림막이 벗겨진 것처럼, 가림막 안에 놓여 있던 온갖 잡동사니가 바람에 휩쓸려 이리로 저리로 굴러다니는 것처럼, 따로 따로 굴러다녀 그전엔 보지 못한.. 2024. 11. 27.
하성란, 여름의 맛 수록 단편, 알파의 시간 중에서 세잔은 '풍경이 내 가운데에서 성찰하고, 나는 그 의식이 된다" 고도 말했다. 세잔이 생트 빅투아르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생트 빅투아르 산이 세잔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 산 앞에서 산이 그를 볼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렸을 것이다.내 앞의 풍경은 까마귀 한 마리 끼어들 틈 없이 조밀하고 견고했다. 그때까지도 고갯마루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차는 없었다. 순간 갈까마귀 떼가 날아오르다 반짝 하얀 배를 보이듯 풍경 한 귀퉁이가 빛났다. 무언가가 감았던 눈을 살포시 뜨고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것을 본 것이 아니 라 그것이 나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 야립 간판은 소유주가 달라 보이는 밭과 밭에 한 다리씩 걸친 채 우뚝 솟아 있었다. 산모퉁이 어디쯤에선가 아련하게 낙석 소리.. 2024. 11. 22.
[가사] 악동뮤지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거지 중에서 일부러 몇 발자국 물러나내가 없이 혼자 걷는 널 바라본다옆자리 허전한 너의 풍경흑백 거리 가운데 넌 뒤돌아본다그때 알게 되었어난 널 떠날 수 없단 걸우리 사이에 그 어떤 힘든 일도이별보단 버틸 수 있는 것들이었죠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널 사랑하는 거지사랑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포기하고찢어질 것 같이 아파할 수 없어 난두세 번 더 길을 돌아갈까적막 짙은 도로 위에 걸음을 포갠다아무 말 없는 대화 나누며주마등이 길을 비춘 먼 곳을 본다그때 알게 되었어난 더 갈 수 없단 걸한 발 한 발 이별에 가까워질수록너와 맞잡은 손이 사라지는 것 같죠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널 사랑하는 거지사랑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포기하고찢어질 것 같이 아파할 수 없어 난 no, oh, oh어떻게 내가 어떻게 너를이후에 우리 바다처럼 깊.. 2024. 11. 20.
[가사] 악동 뮤지션, 물 만난 고기 중에서 한바탕 휩쓸고 간 폭풍의 잔해 속에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한 파도비치는 내 얼굴 울렁이는 내 얼굴너는 바다가 되고 난 배가 되었네고독함이 머무는 파란 도화지 속에죽음이 어색할 만큼 찬란한 빛깔들날아가는 생명들 헤엄치는 생명들너는 물감이 되고 난 붓이 되었네너는 꼭 살아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서내 이름을 기억해 줘음악을 잘했던 외로움을 좋아했던바다의 한마디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말하듯이우리가 헤엄치듯이 살길Live like the way we singOh~oh~oh, oh~oh~oh~oh~oh~oh한바탕 휩쓸고 간 폭풍의 잔해 속에덩그러니 남겨진 마지막 작품독백의 순간을 버티고야 비로소너는 예술이 되고 또 전설이 되었네너는 꼭 살아서, 죽기 살기로 살아서내가 있었음을 음악 해줘그는 동경했던 기어코 물을 만.. 2024.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