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이 초록불이 켜진다. 복사열이 아직 식지 않은 검은 아스팔트 도로를 가로질러, 그녀는 맞은편 거리를 향해 걷는다. 전광판들은 여전히 소리없이 거대한 화면과 활자들을 흘려보내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침묵하며 달리는 미끈한 승용차,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의 소리없는 웃음이 검은 거리 위로 유령처럼 깜박인다.
그때 왜 그렇게 가슴이 서늘해졌던 걸까, 느리디느린 작별을 고하는 것 같던 그 광경이, 헤아릴 수 없는 무슨 말들로 가득 찬 것 같던 침묵이, 여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마치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대답해주었던 것 처럼, 뼈아픈 축복 같은 대답은 이미 주어졌으니, 어떻게든 그걸 내 힘으로 이해해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 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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