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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필사

레이먼드 챈들러, 빅슬립 중에서

by 구구주녀 매일필사 2024. 12. 12.
10월 중순 어느 날 오전 열한시경, 태양은 보이지 않고 한결 뚜렷해진 언덕들이 폭우를 예고했다. 나는 담청색 양복에 암청색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장식용 손수건을 꽂고, 발목에 암청색 수를 놓은 검은색 모직 양말과 검은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이렇게 깨끗하고 단정한 차림새에 면도까지 한데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으니 누가 좀 알아줬으면 싶었다. 그야말로 말쑥한 사설탐정의 모범답안 아닌가. 사백만 달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교차로에서는 노란 불빛이 깜박거렸다. 나는 차를 돌려 한쪽에 깍아지른 듯한 높은 절벽이 있는 언덕 밑으로 미끄러져 가서 도시간 도로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았다. 낮게 뿔뿔이 흩어진 불빛들이 도로 저 멀리 보였고, 부두 불빛의 반짝임도 도시 위에 떠도는 하늘의 달무리도 저 멀리에 있었다. 그쪽에는 안개가 거의 걷혀있었다. 도로를 가로질러 나 있는 길은 절벽 아래로 뻗어 있었고 단정하게 펼쳐진 해변가에 접하는 부두의 자갈 깔린 고속도로의 자락에 이어져 있었다. 차들은 바다를 보고 보도를 따라 주차되어 있었고 모두 깜깜했다. 비치 클럽의 불빛은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나는 차를 커브길 옆에 세우고 헤드라이트를 끈 뒤 손을 운전대 위에 올려놓은 채 앉아 있었다. 점점 옅어지고 있는 안개 아래로, 외식의 언저리에서 형체를 갖추고자 하는 생각마냥 아무런 소리가 없이 파도가 밀려오고 거품이 일었다.

 

 

 

우리는 라스올린다스를 빠져나가 파도가 몰아치는 백사장 위에 지어진 오두막 같은 작은 집들과 그 뒤편 언덕 위에 지어진 더 커다란 저택들이 있는 축축한 해변가의 작은 마을들을 계속 지나갔다. 여기저기 노란 창문에서 빛이 흘러나왔지만 대부분의 집들이 어두웠다. 해초 냄새가 물가에서 밀려와 안개 속을 떠돌았다. 자동차 바퀴는 습기찬 콘크리트 대로 위에서 노래 부르듯 달려갔다. 세상은 흠뻑 젖은 공허 그 자체였다.

‘델레이 비치 클럽 옆으로 내려가요. 바다를 보고 싶어요. 다음 거리에서 왼쪽으로.’

델레이 근처에 가까워질 무렵 드러그스터오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깊은 곳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듯 소리 죽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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