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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필사

최진영, 유진 중에서

by 구구주녀 매일필사 2024. 11. 27.
그런 친구는 처음이었다. 원두커피도 오렌지도 처음이었다. 그 방에서, 어둠이 내릴 때까지, 무영과 나는 이상하고 지루한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다. 가끔 꾸는 악몽과 죽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천박한 어른과 한밤의 산책과 가끔 엄습하는 자해 욕구를 말했다. 없애 버리고 싶은 기억과 박제해 두고 싶은 기억을 조금씩 말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말했다. 매일 다른 날씨와 하늘, 구름, 햇살, 장마, 첫눈, 노을, 겨울철 별자리, 바람에 실려 오는 계절 향기. 그리고 마침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리고 매일 유진 언니를 생각했다. 강한 바람이 불어 가림막이 벗겨진 것처럼, 가림막 안에 놓여 있던 온갖 잡동사니가 바람에 휩쓸려 이리로 저리로 굴러다니는 것처럼, 따로 따로 굴러다녀 그전엔 보지 못한 부분이 더 눈에 띄는 것처럼, 유진 언니와 함께 한 그 시절의 기억은 연속성 없이 개별적으로 세세하게 떠올랐다. 머리를 감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책장에 책을 꽂다가 빨래를 개키다가,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기 직전에 문득 떠올랐다.

 

 

달고 느끼한 커피를 마시며 라디오를 듣고 낙서를 했다. 어둡고 비관적이고 끈적끈적하다가 끝내 햇불처럼 타오르는 낙서였다. 우울감과 무기력은 내 몸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안락한 소파였다. 우울감은 팔이 여럿인 시바 신처럼 쉬지 않고 나를 쓰다듬었다. 나는 매일 파괴 되었으나 창조되었고 창조된 나는 파괴되기 전의 나와 다르지 않았다. 무의미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기나긴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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