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벨문학상8

한강, 희랍어 시간 중에서 어느 사이 초록불이 켜진다. 복사열이 아직 식지 않은 검은 아스팔트 도로를 가로질러, 그녀는 맞은편 거리를 향해 걷는다. 전광판들은 여전히 소리없이 거대한 화면과 활자들을 흘려보내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침묵하며 달리는 미끈한 승용차,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의 소리없는 웃음이 검은 거리 위로 유령처럼 깜박인다.   그때 왜 그렇게 가슴이 서늘해졌던 걸까, 느리디느린 작별을 고하는 것 같던 그 광경이, 헤아릴 수 없는 무슨 말들로 가득 찬 것 같던 침묵이, 여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마치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대답해주었던 것 처럼, 뼈아픈 축복 같은 대답은 이미 주어졌으니, 어떻게든 그걸 내 힘으로 이해해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시시각.. 2024. 12. 9.
[책소개] 아니 에르노, 바깥 일기 명상이나 글쓰기에 관해 찾다보면, 일기를 써보라는 추천을 종종 받는다. 일기를 쓰다보면 온전히 내 자신의 얘기를 하다보면 나를 알 수 있는 순간이 온다고들 한다.  시도하신분은 아시겠지만 그렇게 효과가 좋진 않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옵시디언에 daily diary를 셋팅하고 몇달을 꾸준히 시도했는데, 그저 감정 배설의 찌꺼기 느낌이 드는 글 밖에 남지 않았다. 특히 멘탈이 약한 순간이 어쩔수 없이 오는데.. 그 때의 글은 감정 배설 그 자체의 느낌이 든다. 과연 일기를 쓰면 온전히 내 자신을 마주치게 되는 것이 맞을까?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오롯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 - 장자크 루소  아니 에르노의 바깥 읽기 앞 페이지에 쓰여있는 인트로 문장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나 자신을, 나.. 2024. 10. 30.
필사하기 안좋지만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책들 박민규‘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작가 단편집. 워낙 개성 강한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어 박민규 소설은 절대로 필사하지 말라는 얘기가 있다. 그만큼 독특한 문장을 가진 작가이다. (그럼에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꽤나 많이들 필사하는 책이다) 그림도 아니고, 문장에 이렇게 작가의 개성이 배어있을 수 있다니 감탄하게 될 뿐이다. 그런데 막상 필사를 해보면 길들여 질수가 없는 문장이다. 한참을 필사하다보면 내 문장과 박민규의 문장이 섞이며 이도 저도 아닌 문장이 나온다고나 할까? 하지만 박민규 소설을 필사한 시간이 아깝지는 않다. 적어도 나 자신의 문체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되고 남는다. 내가 너무 평이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지는 않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자.   한강한강의.. 2024. 10. 24.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중 '아기 부처' "이 길을 따라서 계속 가면 너 사는 동네가 나온다더라만. 이렇게 걸어서는 닷새가 걸릴지 엿새가 걸릴지 모르겠구나. 되돌아가려고 하면 꼭 산 저쪽에 너를 남겨두고 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할 때도 있었다." 나무 등걸을 잡고 쉬는 나를 돌아보며 어머니는 뜻밖의 말을 했다. "집에서도 이 산을 보고 있으면, 저 뒷자락에 네가 살고 있으려니 싶었으니......이 산이 너를 나하고 이어주는 것 같아 고맙기도 하고, 더 커 보이기도 하더라."   그녀의 얼굴은 진심으로 서운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날 오전, 마감 기한에 겨우 맞춰 출판사에 도착한 나는 원고만 건네주고 바로 거리로 나왔었다. 않기 시작한 뒤 시내에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길고 스산했던 겨울이 어느 사이 끝나 가고 있었다. 여자들의 옷은 얇아.. 2024. 10. 22.
한강, 희랍어 시간 중에서 스위스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제네바에는 들르지 않았다. 그의 무덤을 굳이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가 보았다면 무한히 황홀해했을 성 갈렌의 도서관을 둘러보았고, 루체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저물녘까지 얼음 덮인 알프스의 협곡 사이를 떠다녔다.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다.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 속에만 기록되었다. 어차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 감촉 들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다. 여느 때처럼 묵묵히 흑판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단신에 머리가 반쯤 벗어진 불어선생이 그 단어를 가리키며 발음했다. 그녀의 방심한 두 입술이 어린아이처럼 달싹이려 했다. 비블리오떼끄.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 2024. 10. 21.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중에서 그는 열기와 냉기가 살갗 위로 고루 퍼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소름이 돋으며 행복한 느낌이 온몸을 훑고 지나 눈물이 되어 솟아 오른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화덕으로가 김이 오르는 더운물을 대야에 떠 담는다, 네 여기 더운물 가져갑니다. 올라이는 생각한다 그리고 대야에 더운물을 떠 담는다 그리고 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그거면 충분하겠네, 그래 이제 됐어요. 그는 창고 밖으로 나오다 문가에서 멈칫한다. 그리고 문득 그런 느낌이 든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어떤 목소리가 그를 부르는 것 같다,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 다시 들어가, 요한네스, 잘 둘러봐,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고 요한네스는 왠지 그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시 들어가서 잘 둘러보는 게 좋겠어. 모든게 제대로 있는.. 2024. 1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