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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필사20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중에서 그는 열기와 냉기가 살갗 위로 고루 퍼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소름이 돋으며 행복한 느낌이 온몸을 훑고 지나 눈물이 되어 솟아 오른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화덕으로가 김이 오르는 더운물을 대야에 떠 담는다, 네 여기 더운물 가져갑니다. 올라이는 생각한다 그리고 대야에 더운물을 떠 담는다 그리고 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그거면 충분하겠네, 그래 이제 됐어요. 그는 창고 밖으로 나오다 문가에서 멈칫한다. 그리고 문득 그런 느낌이 든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어떤 목소리가 그를 부르는 것 같다,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 다시 들어가, 요한네스, 잘 둘러봐,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고 요한네스는 왠지 그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시 들어가서 잘 둘러보는 게 좋겠어. 모든게 제대로 있는.. 2024. 10. 21.
아니 에르노, 한 여자 중에서 간호사가 어서 병원의 호적 담당과에 다녀오라고 권했다. 그동안 어머니의 개인 소지품 목록을 작성하게 된다. 어머니는 이제 가진 것이 거의 없어서, 정장 한 벌, 푸른색 여름 구두 한 켤레, 전기면도기 하나가 전부였다. 어떤 여자가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는데, 몇 달 전부터 늘 그래 오던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는 아직 살아 있는데 내 어머니는 죽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주 내내 아무 데서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벌어졌다. 잠에서 깨어나다가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곤 했다. 어머니가 꿈에 나왔고, 죽었다는 것을 빼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무거운 꿈에서 빠져나 오기도 여러 번이었다. 생활에 필요한 일들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장보기, 식사, 세탁기로 빨래 돌리기. 종종 어떤 순.. 2024. 10. 21.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중에서 상태가 상당히 심각해지자, 나는 카드점 치는 사람을 찾아가 상담을 받고 싶어졌다. 그것만이 내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줄 것 같았다… 한 여자 점쟁이의 주소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는 동안, 지난달에 A를 생각하며 새 원피스를 고르던 때와 비슷한 희열을 느꼈다. 아직도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점쟁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 사람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예언을 듣게 될까 두려웠다. 나는 ‘내가 그에게로 가면 돼' 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그에게 가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때로, 그 사람이 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게 아닐까 자문해보기도 했다.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태연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하고.. 2024. 9. 12.
박민규, 더블 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도 남은 몇장의 사진 때문이다. 한결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한 장의 결혼사진도, 두어 장의 스냅사진도 모두가 경직된 표정이었다.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그래서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결국 삶이란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는 것인가, 두 분의 사진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오피스텔을 정리하며 뒤적인 나의 사진도 대부분 그런 얼굴이었다. 희, 노, 애, 락을 겪으면서도 인간은 대부분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무표정한 얼굴을 이 땅에 남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바람이 분다.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담담한 모습이겠지만, 더없이 풍만한 감정으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2024. 9. 11.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중에서 나는 이렇게 초저녁에 장사를 막 시작한 술집이 좋다. 실내 공기는 아직 신선하고 깨끗하지, 모든 게 반질반질하지, 바텐더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면서 넥타이는 똑바로 맸는지, 머리는 단정한지 확인해 보고. 바 너머에 가지런히 늘어 놓은 술병도 좋고. 사랑스럽게 반짝거리는 술잔도 좋고. 그때마다 느껴지는 기대감도 좋아. 바텐더가 그날의 첫 잔을 준비해 보송보송한 받침에 내려놓고 옆에 냅킨을 조그맣게 접어 놓아 주는 것도 좋다. 그 술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도 좋아. 조용한 술집에서 그날의 첫 잔을 조용히 마시는 순간... 정말 근사하다니까.   슬픔에 잠긴 한 남자가 카운터 앞의 걸상에 앉아 바턴더에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술잔을 닦으며 이야기를 듣는 바텐더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애쓸 때 흔.. 2024. 9. 5.
무라카미 하루키, 반딧불이 중에서 나는 반딧불이가 든 인스턴트커피 병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누군가 걷는 것을 잊어버린 하얀 셔츠가 빨랫줄에 걸려서 무슨 허물처럼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옥상 구석에 있는 녹슨 철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급수탑 위에 섰다. 원통형의 급수 탱크는 낮 동안 듬뿍 빨아들인 열로 아직 따뜻했다. 좁은 공간에 앉아 난간에 기대 있으니 아주 조금 이지러진 흰 달이 눈앞에 떠올랐다. 오른쪽에는 신주쿠 거리가, 왼쪽으로는 이케부쿠로 거리가 보였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선명한 빛의 강이 되어 거리에서 거리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양한 소리들이 뒤섞인 부드러운 신음이 마치 구름처럼 거리 위로 떠올랐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밤의 어두운 물소리뿐이었다. 벽돌로 만든 오래된 수문도 있었.. 2024.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