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필사20 하성란, 여름의 맛 중에 먹어보지 않아도 그 나무를 보는 순간 바로 그 복숭아나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듯했다. "복사꽃이 피면 산등성이가 온통 꽃바다가 됩니다. 바람도 비도 꽃이에요. 돗자리를 깔아놓고 밥도 먹고 노래도 불러요. 내 복숭아나무는 산등성이 맨 위에 있어 햇빛을 가장 오래 받지요." 그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맨발로 복사꽃이 흐드러진 복숭아나무들 사이를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건 매년 복사꽃이 피고 열매가 달리는 그곳이 점점 구체화되고 있는 것에 비해 그의 얼굴은 점점 더 희미해져 나중엔 희부연 실루엣으로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산 입구에는 등산객을 상대로 하는 노점상들이 서 있었다. 촌 여자들이 콩국을 팔았다. 고무로 된 커다란 젓갈통이었다. 그 안에 콩국이 가득했다. 커다란 .. 2024. 11. 13. 양귀자, 모순 중에서 사랑하지 않고 스쳐 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도 동시에 안전도 예고하는.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것만 있는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것이 더 많은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옳은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다는 네 말은 핑계같아. 내겐 교활하게 들여. 세상이 그런것이라면 우리가 애써 열심히 살아야하는 이유가 뭐겠어? 난 지금 정말 슬프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수 있는 우리.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2024. 10. 31. 무라카미 하루키, 빵가게 재습격 사건 중에서 삼 년이라는 세월이 나를 이 11월의 비 오는 밤으로 데려다 주었다.그러나 어쩌면 나는 이 새로운 세계에도 조금씩 익숙해져갈 것이다. 시간은 걸릴지 모르겠지만 차츰 뼈와 살을 이 무겁고 습한 우주의 단층 속에 파고들게 할 것이다. 결국 사람은 어떤 상황에든 스스로를 동화시킨다. 아무리 선명한 꿈도 결국은 선명하지 못한 현실 속으로 소멸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조차 나는 떠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는 베개 맡의 불을 끄고 눈을 감은 채 침대 위에서 천천히 몸을 폈다. 그리고 꿈이 없는 잠 속으로 의식이 침몰해갔다. 비가 창을 두드리고, 어두운 해류가 잊혀진 산맥을 들추어냈다. 선명한 달빛이 주방 창으로도 들어와 바닥과 벽에 기묘한 음영을 드리웠다. 그것은 전위극의 상징적인 무.. 2024. 10. 30.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중 '아기 부처' "이 길을 따라서 계속 가면 너 사는 동네가 나온다더라만. 이렇게 걸어서는 닷새가 걸릴지 엿새가 걸릴지 모르겠구나. 되돌아가려고 하면 꼭 산 저쪽에 너를 남겨두고 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할 때도 있었다." 나무 등걸을 잡고 쉬는 나를 돌아보며 어머니는 뜻밖의 말을 했다. "집에서도 이 산을 보고 있으면, 저 뒷자락에 네가 살고 있으려니 싶었으니......이 산이 너를 나하고 이어주는 것 같아 고맙기도 하고, 더 커 보이기도 하더라." 그녀의 얼굴은 진심으로 서운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날 오전, 마감 기한에 겨우 맞춰 출판사에 도착한 나는 원고만 건네주고 바로 거리로 나왔었다. 않기 시작한 뒤 시내에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길고 스산했던 겨울이 어느 사이 끝나 가고 있었다. 여자들의 옷은 얇아.. 2024. 10. 22. 한강, 희랍어 시간 중에서 스위스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제네바에는 들르지 않았다. 그의 무덤을 굳이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가 보았다면 무한히 황홀해했을 성 갈렌의 도서관을 둘러보았고, 루체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저물녘까지 얼음 덮인 알프스의 협곡 사이를 떠다녔다.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다.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 속에만 기록되었다. 어차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 감촉 들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다. 여느 때처럼 묵묵히 흑판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단신에 머리가 반쯤 벗어진 불어선생이 그 단어를 가리키며 발음했다. 그녀의 방심한 두 입술이 어린아이처럼 달싹이려 했다. 비블리오떼끄.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 2024. 10. 21.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에서 은근한 따돌림이 있었을 때도 동료들은 그녀에게 친절했다. 아침이면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고, 엘리베이터나 화장실에서 만나면 반가운 내색을 했다.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기도 했다. 공적인 일에서 그녀를 배제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몇몇 분명한 순간들이 있었다. 모두가 받은 동료의 청첩장을 받지 못했을 때, 탕비실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질 때, 아주 사소한 주제라도 그녀와는 사적인 대화를 이어가지 않으려는 기미가 느껴질 때, 어떤 말도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있어서 버겁고 불편하다는 분위기가 감돌 때, 우리의 세계에 온전히 소속될 수 없는 당신을 나는 안타깝게 여기지만 도울 생각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 그녀는 그런 상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2024. 10. 21.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