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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에서 은근한 따돌림이 있었을 때도 동료들은 그녀에게 친절했다. 아침이면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고, 엘리베이터나 화장실에서 만나면 반가운 내색을 했다.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기도 했다. 공적인 일에서 그녀를 배제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몇몇 분명한 순간들이 있었다. 모두가 받은 동료의 청첩장을 받지 못했을 때, 탕비실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질 때, 아주 사소한 주제라도 그녀와는 사적인 대화를 이어가지 않으려는 기미가 느껴질 때, 어떤 말도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있어서 버겁고 불편하다는 분위기가 감돌 때, 우리의 세계에 온전히 소속될 수 없는 당신을 나는 안타깝게 여기지만 도울 생각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 그녀는 그런 상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2024. 10. 21.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중에서 그는 열기와 냉기가 살갗 위로 고루 퍼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소름이 돋으며 행복한 느낌이 온몸을 훑고 지나 눈물이 되어 솟아 오른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화덕으로가 김이 오르는 더운물을 대야에 떠 담는다, 네 여기 더운물 가져갑니다. 올라이는 생각한다 그리고 대야에 더운물을 떠 담는다 그리고 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그거면 충분하겠네, 그래 이제 됐어요. 그는 창고 밖으로 나오다 문가에서 멈칫한다. 그리고 문득 그런 느낌이 든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어떤 목소리가 그를 부르는 것 같다,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 다시 들어가, 요한네스, 잘 둘러봐,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고 요한네스는 왠지 그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시 들어가서 잘 둘러보는 게 좋겠어. 모든게 제대로 있는.. 2024. 10. 21.
아니 에르노, 한 여자 중에서 간호사가 어서 병원의 호적 담당과에 다녀오라고 권했다. 그동안 어머니의 개인 소지품 목록을 작성하게 된다. 어머니는 이제 가진 것이 거의 없어서, 정장 한 벌, 푸른색 여름 구두 한 켤레, 전기면도기 하나가 전부였다. 어떤 여자가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는데, 몇 달 전부터 늘 그래 오던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는 아직 살아 있는데 내 어머니는 죽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주 내내 아무 데서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벌어졌다. 잠에서 깨어나다가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곤 했다. 어머니가 꿈에 나왔고, 죽었다는 것을 빼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무거운 꿈에서 빠져나 오기도 여러 번이었다. 생활에 필요한 일들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장보기, 식사, 세탁기로 빨래 돌리기. 종종 어떤 순.. 2024. 10. 21.
황순원, 소나기 중에서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개울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2024. 10. 21.
[한편의 시] 베르톨트 브레히트, 마리 A.의 추억 1그 푸르렀던 9월의 어느 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말없이 그녀를, 그 조용하고 창백한 사랑을 나는 귀여운 꿈처럼 품에 안았었다. 우리의 머리 위로 아름다운 여름 하늘에는 구름이 한 점 떠있어,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구름은 아주 하얗고 아득히 높아 내가 올려다 보았을 때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2그 날 이후 수많은 달들, 숱한 세월이 소리없이 흘러 지나가 버렸다. 그 자두나무들은 아마 베어져 없어졌을 것이다. 사랑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너는 나에게 묻는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나는 너에게 말하겠다. 하지만 네가 무슨 뜻을 품고 있는지 나는 이미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정말로 끝끝내 모르겠다. 내가 언젠가 그 얼굴에 키스를 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3그 키스도, 구름도 거기 떠있지 .. 2024. 10. 18.
김선아, 도서관 길고양이 중에서 쿵쾅쿵쾅 다미의 가슴이 뛰었다. ‘이 고양이를 키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미는 도서관에서 몰래 고양이를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답답하기만 하던 도서관이 달리 보였다. 고양이와 다미만의 아늑한 안식처로 이만한 장소가 없을 것 같았다. 도서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자 다미는 일부러 창문을 살짝 열어 두었다.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2024. 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