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번역서를 필사해도 괜찮을까?
필사를 하다 보면 상당히 고민이 되는 문제다. 필사가 하루 아침에 책 뚝딱 할 수 있다면야 상관없겠지만... 몇 달이라는 시간을 투자하려면, 시간을 들여 '필사하기 좋은책'을 골라야 할 필요가 있다. 내용은 마음에 들지만, 번역체를 따라 해야 할까? 말까? 는 당연히 고민이 되는 포인트이다.
번역서는 당연히 원서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해주지 않는다. 그나마 우리나라 말과 어순도 같고, 한자도 많이쓰며, 비슷한 단어가 많은 일본어로 쓴 책만 봐도 번역자에 따라 확연히 다른 문장을 보여준다. 문학사상사의 '상실의 시대'(유유정 번역)와 민음사의 '노르웨이의 숲'(양억관 번역)의 번역을 비교해보자. (어떤 번역이 좋은지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둘다 훌륭한 번역이니, 개인의 취향으로 선택하시길.) 여러 문장을 볼 필요도 없이, 단 한문장 만으로 충분히 차이점이 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 유유정 번역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 양억관 번역
단 한문장을 봐도 느낌이 전혀 다르다. '대극 對極 '? 일본어에서는 자주 쓰는 단어이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단어이다.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의미는 "서로 마주 대하는 극" 이라고 나온다. 어색하다. 단어 자체가 직관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이런 안쓰는 단어를 필사할 이유가 있을까?
그럼 '반대편'의 번역이 옳을까? 이것을 필사해야하나? '대극'의 단어에는 서로 '마주 대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반대편'에 이 의미가 있을까? 아니다. 반대편이 조금 더 넓은 의미이다. 마주 대하지 않아도 '반대편'이 될 수 있다. 의미는 훨씬 와 닿지만 작가의 의도가 정확히 들어 있는가? '대극'에 비해 그렇다고는 할수 없다. 그럼 작가의 의도와는 (조금은) 다른 문장을 필사할 이유가 있을까?
필사 관련 글들을 보다보면, 번역서를 필사하지 말라는 말들이 주를 이룬다. 번역서 필사는 나 역시 고민이 많이 되는 문제이며, 나름 시도도 여럿 해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지금도 필사하길 즐겨하는 작가이다.)
내 경험과 함께 그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장력을 키우거나, 어휘력을 쌓기 위해서라면) 번역서는 필사하지 말 것.
필사의 목적은 오롯이 문장력을 키우는데에만 있지 않다. 작가의 정신, 문단의 구성, 작가의 생각을 받아들임에도 필사는 도움이 된다. 이런 생각이 들게 한 책이 '아니 에르노' 책이었다.
산문체로 쓰여졌으며, 때로는 시의 단어가 곳곳에 녺아 있는 소설이다.
물론 필사용으로 불편하다. 필사를 하다보면 이해가 잘 가지 않고 불편함이 느껴지는 문장이 한아름 나온다. 하지만 읽을 때는 놓쳤던 압축되고 이중적인 독특한 단어의 의미가 필사를 할때 더욱더 울림을 주기도 한다.(나의 문해력을 탓하진 않으려한다..) 글로 쓰면서 어딘가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나의 느낌으로 새로 고쳐보는 것도 좋다. 내 방식대로 해석한, 아니 에르노의 생각이 담긴 고쳐쓴 내 문장이 나올때의 쾌감은 상당하다.
우리나라 책은 어딘가 모르게 다소 뻔한 면이 있다. 같은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는 다양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문장력이라는 장점을 잠시만 내려 놓으면, 나랑 다른 장소, 다른 시간대에서 살아간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만날수 있다. 필사를 통해, 온몸으로 만날 수 있다.
필사의 이유를 반드시 문장력에 국한할 필요가 있을까? 번역서를 통해 머리를 식힐겸, 천천히 돌아가보는 것도 좋다. 필사를 통해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기분전환 해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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