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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습작) 올가, 성 요한절

by 구구주녀 매일필사 2024. 10. 24.
습작.. 이었으면 차라리 좋겠지만 이것은 습작도 아니다. 전혀 내 오리지널티의 글이 아니다. 욘포세의 ‘저사람은 알렉스’의 문장을 대거 가져와 다른 스토리로 짜집기 했다. 왜 그랬을까? 그냥 그러고 싶었다. 필사를 하다 실패하였을때 뭐라도 해보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에 반해 이런 짓을 저질렀다.. 비어있는 스토리에 몇문단을 채운 것 뿐, 대부분 욘포세의 문장이다. 이 글은 단순히 연습을, 욘포세 문장을 느끼기 위한 글이다.

 

 

 

29세의 올가, 개썰매를 타고 떠난다

남편과 올가는 그런 곳에 살고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남편과 그녀, 둘뿐인 곳. 다른 모든 사람들이 떠난 곳. 봄이 봄이며, 가을이 가을이고, 겨울이 겨울인, 그리고 여름이 여름인 곳에서 살고 있다. 밤이 되면 어둠이 어둠인 곳, 그런 곳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겨울인 지금. 겨울이 지속되는 속에 살고있다. 그래도 결국 봄이 오면 빛, 따뜻한 날들, 초원의 나무들, 나무의 싹과 잎들이 피어날 것이다. 이 어둠, 이 영원한 어둠, 영원히 견디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녀는 거의 캄캄해진 하늘을 본다. 벌써 지금, 아직 오후인 지금, 벌써 어두워지다니. 그녀는 생각한다. 오늘이야, 십 이년이 지났어, 어두운 쪽의 하늘의 숲 위에 별이 하나 반짝 보였을 때 그녀는 생각한다. 바로 오늘이 떠날 날이야. 오늘 밤 이곳을 떠날꺼야. 구름도 없어, 달이 길을 밝혀줄꺼야. 달빛이 없으면 별을 보고 달려갈꺼야, 그리고 떠나야지. 그리고 그녀는 별 아래 자작나무 숲을 바라본다. 숲은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서있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다른 편, 산들을 바라본다. 밝은 암회색으로 가볍게 움직이는 하늘 아래, 검은색과 회색 사이를 구분할 수 없는 암벽이 수목 한계선까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나무들도 검은빛이지만, 그것들이 다시 초록으로, 반짝이는 초록으로 물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산을 바라본다. 저기 암벽 비탈이 급경사를 이루는 곳, 봄이 오면 제일 먼저 아름다워지는 곳. 아니, 이제 그만해야 한다. 그녀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숲에 벌써 봄이 오는 것 같다. 암벽 비탈이 점점 더 깊게 아래로, 처음엔 나무들, 그 다음엔 언덕과 목초지, 그리고 집 몇채. 여기저기 집 몇 채가 흩어져 있는 곳까지 급경사를 이루는 곳. 아직은 검게 물들어 있는, 곧 아름다워질 곳들. 그래 오늘, 오늘이 떠날 날이야.

 

그래, 그런거야. 지금은 모든 것이 검은빛과 같을 뿐이야. 십 이년간 그런 거지. 그렇게 긴 겨울이 지났던거지. 그녀는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를 벋어나면, 그를 만나게 되면 다를거야. 오늘이 십 이년째야. 금발의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마을 성요한제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를 만나면 모든게 다 정말 깨끗한 파란색이고, 반짝이는 초록색이야. 그러면 하늘과 저 숲이 서로 마주하고, 그 둘은 푸르디푸를거야. 그 둘은 경쟁하듯 반짝이겠지. 그래, 그랬어. 그때는 그랬지. 그리고 이제 다시 그럴꺼야.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창고에서 꺼낸 개썰매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그녀는 개 우리로 향한다.

 

그녀의 발자욱 소리를 듣고 몇몇 개들이 고개를 빼꼼히 든다. 짖지마. 나야, 평소에 오는 남편은 아니지만, 나야. 알아보는거지? 제발 짖지마. 오늘은 나와 같이 가야해. 조용히. 그녀는 주머니에 넣어둔 개 간식을 꺼낸다. 개들이 폴짝뛰며 올가에게 몰려든다. 이거 먹어. 나야. 오늘은 나와 함께야. 지금 어쩌면 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조심히 창문을 쳐다본다. 창문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그가 창가에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분명하다. 밝은 창가에 그가 서서 그녀를 향해 바라보고 있다. 보이지 않아. 이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아. 집안에서 창을 통해 보이는 것은 어둠 뿐이야.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를 볼 수 없음에도 그는 분명히 그녀를 향해 보고 있다. 그녀는 그를 보고 있다. 밝은 창가에 그가 서서 어둠을 내다본다. 그녀 쪽을 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서 있는 그녀는,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짧은 시간이었어. 어쨌든 잠시만 밖에 있었어. 아직은 들키지 않아. 그녀는 생각한다. 분명 남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그는 전혀 그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녀는 빠르게 개들에게 개썰매를 묶는다. 하지만 겨울인 지금, 창밖에 볼 수 있는게 어둠 뿐이라면, 왜 남편은 지금 창앞에 서 있는 걸까?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보이는 걸까? 내가 보인다면, 그러면 그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기다리는 걸까? 기다리고 있다면, 그러면 그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은 왜 그러는 걸까? 아무 것도 볼게 없는데 창 앞에 왜 서있는 걸까? 그녀는 생각한다.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도, 그녀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단지 말없이 창밖을 처다볼 뿐. 어두운 창문을 말없이 처다보듯이. 지금 창가에서 그녀 쪽을 바라보듯이, 아무말도 없이.

 

올가는 썰매에 올라타 조심스럽게 고삐를 당긴다. 딱 당겨진 고삐만큼이나 조심스레 개들이 발을 옮긴다. 한걸음 한걸음. 그리고 썰매는 조용히 움직인다. 남편은 계속해서 그녀 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거기엔 볼게 아무것도 없다. 단지 어둠뿐, 거의 캄캄한 무거운 어둠뿐. 개썰매는 조용히 움직인다. 그녀는 그들의 집을, 창문을 올려다 본다. 거기에 남편이 서 있다. 짧은, 검은 머리를 하고 그가 거기 서서 내다보고 있다. 그가, 그녀의 남편이, 그는 거기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마치 창문의 일부인 듯. 그녀는 생각한다. 어쩌면 그는 처음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수년 내내 그는 거기 서 있었다. 작은 키, 검은 머리, 큰 눈,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창틀과 같은 어둠. 이제 올가는 다시 보시 않아도 될 장면을 머리 속에 새기며 고삐를 좀더 강하게 당긴다.

 

 

17세의 올가

모두들 말없이 광장에 모여 있다, 산더미 같이 쌓인 장작 앞에서. 어둠 속에서 산더미 같이 쌓인 장작에 불이 붙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올가는 두손을 모아 입김을 분다. 광장은 춥고, 어둡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다들 성요한제의 불이 붙기를 기다리고 있다. 불이 붙으면 따뜻해지겠지, 어둠을 몰아내고 사방을 환하게 비춰주겠지. 그녀는 생각한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있어. 인근 다른 마을 사람들도 모여있어. 내 약혼자도 여기 어딘가 있겠지. 검은 머리를 한 나의 약혼자. 사랑하지 않아. 몇번 보지도 못했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그냥 집안의 약속일 뿐. 이대로 나는 내일이 되면 결혼을 해야 해.

 

사람들은 숨죽여 다들 각자의 사정으로 성요한제의 불을 기다린다. 소원이 이루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정작 그 소원이 무엇을 바라는지 스스로 알지 못하며. 어둠 속에 불이 반짝 피어오른다. 그리고 다시 어두워진다. 수많은 사람의 숨을 멋게 짓누르는 검은 어둠. 장작 전체가 붉그스름해지더지 모든 장작이 동시에 빛을 발하듯 타오르기 시작한다. 저기 누군가 있어. 올가는 생각한다. 어둠이 찰라 빛이 되었을때 올가는 불빛 속에 누군가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하나가 된 불빛. 사람들의 환성이 터져나온다. 그와 함께 악단의 경쾌한 춤곡이 광장에 울려퍼진다. 모두가 옆에 있는 사람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처음 보는 금발의 남자가 올가 앞으로 다가온다. 춤을 추며. 모자를 벗어 올가에게 춤을 청한다. 긴 금발의 머리카락이 그의 어깨 위로 흘러 내린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의 살갗을 스친다.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짓지만, 시간 감각을 잃어, 그가 그녀의 손을 더듬은 순간이 길었는지 짧았는지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불타던 나무가 불에 타 와르르 무너지며 수많은 작은 불똥이 솟아오른다. 순간 불똥들과 함께 거센 불꽃이 치솓는다. 그녀는 가만히 불을 바라본다. 거대한 불꽃이 그녀를 향해 다가온다. 순간 눈 앞이 시커머진다. 노란 불꽃, 금발의 머리, 그 남자가 다가온다. 그의 품이 그녀를 감싸 앉는다. 막아준건가? 저 불꽃으로 부터?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불꽃의 아늑한 뜨거움을 느낀다.

 

이내 불은 다시 원래 있었던 자리로 사그라든다. 그리고 그녀는 금발의 남자 품에서 춤을 추고 있다. 어느새 그녀가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불현듯 알게 된다. 그녀는 이 남자에게 자신의 약혼자가 여기에 같이 있음을 그에게 말할 수 없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말할 수 없다. 결코 말할 수 없다. 춤을 추며 성요한제 불을 돌고 있다. 이제 불은 그녀의 곁, 가까이에 있다. 춤을 추며 빙글 빙글 도는 탓에 어디가 모닥불 쪽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느낀다. 저기 성요한제의 거대한 불꽃. 어둠 속, 화려한 붉은 불꽃, 그리고 금발의 머리카락. 불꽃은 점점 더 아름답게 타오르고 있다.

 

둘은 어디론가 서둘러 어딘가로 간다. 눈이 부신 듯, 어둠을 찾아서. 모두가 바라보는 성요한제의 불꽃에서 둘만이 멀어진다. 눈이 부신다. 지금은 어둠이 필요해. 서둘러, 시간이 없어, 성요한제의 불꽃이 꺼지기 전에. 그녀는 생각한다. 이내 찾은 아무도 오지 않을 창고를 보고 서둘러 빗장을 연다. 끼이익. 큰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다행히 창고안은 어둡다.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둘은 건초 더미위로 포개져 쓰러진다. 황급히 쓰러지며 갑작스레 그녀의 볼에 그의 입술이 닿는다. 가벼운 전율이 그녀의 몸을 지나간다. 나를 데려가 줘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오늘, 이 마을이 아닌 곳에 데려가 줘요. 촉촉해진 입술을 조금 벌려서 그의 귓가에 속삭인다.

 

문득 그의 눈이 발하는 불꽃이 그녀를 에워싼다. 온기! 끝도 모를 온기. 온몸을 감싸안는 따스로움. 그녀는 그 온기 속에서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 그녀는 결혼을 하루 앞둔, 약혼자를 둔 올가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녀의 불안과, 그녀의 두려움과, 그녀를 불안하게 했던 결핍, 그녀가 그리워했던 모든 것이 온기에 감싸졌고, 그와 동시에 그녀는 평온해진다. 그녀는 두 팔을 양 옆으로 쭉 늘어뜨린 채, 아무런 의지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가만히 있다. 난생 처음 느껴본 평온함에 몸을 맡긴다. 말할 수 없는 평온함 속에. 그는 두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았고, 그녀의 가슴을 자신의 몸에 바짝 가져간다.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고 그의 품에 안긴다. 그는 온몸으로 그녀의 몸에 밀착하고, 그녀도 이내 두팔을 올려 그를 안는다. 그리고 뜨거운 그의 몸이 그녀의 몸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 무엇인지 모르는 감정에 몸을 맡겼다.


이제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의 내면에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성요한제의 불꽃을 바라보게 되었을때, 불이 붙기 시작한 장작을 처음 바라보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녀는 생각한다. 어쩌면 불길에 따스함을 느끼고 가까이 다가갔다는게 문제였을까, 그가 긴 금발의 머리를 날리며 그녀에게 다가왔을 때가 문제였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왜 그랬던 걸까? 나는 왜 그렇게 그에게 매달렸나? 아니면 적어도 그가 그녀에게, 그리고 금발의 남자가. 그렇다. 그녀는 그에게 매달렸다. 그랬었다. 당연히.

 

나를 데려가줘요.

 

그들은 서로에게 어쨌든 매달렸다. 그랬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그녀에게 만큼은 아닐지도 모른다.

 

십 이년 후에.

 

금발의 남자는 말했다. 그는 여기 그녀 곁에 있었다. 그가 사라지기 전까지, 그녀는 생각한다. 그는 그녀 곁에 있었다. 하지만 계속 있는 않았고 그래서 그만큼 너무나 바랬던 것 처럼, 그 바램은 그녀에게 일생 동안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던 것처럼 그에게 매달렸다. 그것은 아주 우연이었고, 어렵지도 않았으며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이미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아주 당연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랬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든, 하지 않든, 말하자면 전혀 차이가 없었다. 모든게 마치 정해져 있었던 듯 진행되어야 하는듯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를 데려가주었으면 하는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치 정해져 있었는 듯.

 

당신은 누구죠. 이 마을 사람이 아니에요.

 

그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다.

 

나를 데려가줘요. 내일이면 전 원치않은 결혼을 해야해요.

시간이 필요해.

시간? 얼마나.

십 이년.

십 이년 후에 나를 데려가겠다고요? 전 내일 결혼해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원하지 않는 결혼 생활을 십 이년을 하라고요?

십 이년은 금방이야.

나를 기억할건가요.

기억해. 매년 성요한제의 날이면 당신을 기억할꺼야. 성요한제의 불꽃 앞에서 다시 만나면 우리는 떠날 수 있어.

 

그래. 그래. 그랬지, 그런 극적인 일이 있어도 변할 건 없었다. 성요한제의 불이 있었다. 누군가를 만났고, 잠시 희망에 차 누군가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그녀는 내일 결혼을 한다. 그렇게 정해진 것 대로 그랬다. 그녀가 오늘 무언가를 했는지, 아니면 아니했는지 간에.

 

이걸 목에 걸고 나를 기억해줘. 성요한제의 불 앞에서 만나.

 

그는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빼어 그녀의 목에 걸어준다. 조각칼로 만든 듯한 거친 나무 십자가가 그녀의 목에 걸렸다.

기억할께요.

 

명심해. 성요한제의 불이 붙기 전에 도착해야해. 불이 붙는 순간에 우리가 같이 있다면 같이 떠날 수 있어.

네. 성요한제 불 앞에서. 십 이년 뒤.

 

올가는 거친 나무 십자가를 손으로 만지작 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그들은 헤어졌다. 그녀는 내일 결혼을 한다. 사랑한 적 없는 검은 머리의 마을 사람과.

 

 

29세의 올가, 쓰러저 그를 다시 만나다

올가는 쓰러져 있다. 뒤집어져 있는 개썰매 옆에. 어찌 된 일이지? 눈발을 헤치며 달려가던 썰매에 앉아 있던게 마지막 기억이다. 조급했어. 너무 서둘렀어. 서두른 탓에 튀어나온 나무 뿌리에 걸렸던거야. 조금 더 천천히 왔어야 했어. 그녀는 생각한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안돼. 일어나야해. 발을 디뎌야해. 일어나게 되면, 제대로 일어나게 되면, 제대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면, 그러면 갈 수 있어. 금발의 그를 만날 수 있어. 성요한제의 불이 붙기 전에 도착해야해.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채 밤하늘을 본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숨을 크게 들이 마신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가득 들어온다. 그리고 따스한 입김을 하얗게 내뿜는다. 평소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거운 것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다. 마치 그 무거운 것들이 하얀 입김이 되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는거 같다. 별빛이 저렇게 밝았던가? 그녀는 입김 사이로 빛나는 별빛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누운 채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 그녀가 짐작하건대 꽤 긴 시간이었으리라. 어쩌면 그녀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그렇게 누워 있었을지도 모른다. 개들은 올가의 상황을 모르는지 아니면 신경쓰고 싶지 않은지 그녀 주변을 돌아다닌다. 군데 군데 껴있던 옅은 회색의 구름이 희미하게 사라져 가고 있다. 별빛이 더더욱 밝아진다. 어디선가 눈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올가는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아프지만 고개가 조금 돌아간다. 내친김에 팔도 움직여 본다. 꿈쩍도 하지 않던 팔이 조금씩 들어 올려진다. 금발의 그가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걸어온다. 그녀를 향해. 기억하고 있었어.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녀는 손을 서서히 목으로 가져간다. 나무 십자가를 만진다.

금발의 남자가 올가 옆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녀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는다. 긴 금발의 머리카락이 출렁거리며 올가의 얼굴을 감싼다. 출렁이는 머리카락 사이로 별빛이 보였다 숨었다하며 반짝거린다.

 

시간을 못지켰군.

여기까지 밖에 못왔어요. 노력했는데.

성요한제의 불이 이미 붙었어.

성요한제 불꽃은 여전히 아름다운가요.

십 이년 전 처럼.

 

순간 금발의 남자의 눈 속에서 불꽃이 반짝이는 듯 반짝인다. 올가에게 십 이년 전의 불꽃의 아름다움이 기억이 난다. 둘이 처음 만난 순간이 기억난다. 올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기다렸는데. 오늘을 기다리며 십 이년을 버텼는데. 떠날 수 있었는데. 거의 도착했었는데. 오늘은 떠날 수 없어.

 

십 이년뒤에 다시 볼 수 있나요.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성요한제의 불 앞에서.

 

그는 올가의 손을 잡아준다. 추웠던 온몸이 따뜻해진다. 멈춰있던 몸이 움직인다. 이제는 일어날 수 있다. 가야지. 집으로 돌아가야해. 십 이년 뒤에 다시 올꺼야.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 눈에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41세의 올가

그녀는 이미 이십 사년째 여기에 살고 있다. 남편과 나의 오래된 집에. 이십 사년. 정말 그렇게 오래되었나? 그게 가능한 일일까?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가 그를 처음 만난게, 밝은 금발의 긴머리를 하고 다가오는 그를 본게 이십 사년 전 성요한제.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아마도, 분명히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속해 하나가 되었다. 그랬다. 별다른 신호도 없이 아주 간단히.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서로는 헤어졌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고 성요한제 다음날 그녀는 남편과 결혼했다. 정해져 있던 대로.

 

성요한제, 그때는 불꽃이 있었다. 바람 속에, 그리고 어둠 속에 반짝이는 성대한 불꽃이. 성요한제에 맞춰 준비된. 아마도 누군가의 망가진 장롱이었을, 탁자였을, 개썰매였을 수북히 쌓여있던 쓸모 없는 장작을 태우고 있는 노랗고 빨간 불꽃. 그리고 그 주위에 흩날리는 수많은 불똥과 함께 춤을 추는 수많은 사람들. 사람들이 올가 눈앞을 지날때마다 보이는 칡흑, 다시 반짝이는 불꽃. 어둠, 불꽃을 가리는 그림자. 그리고 그가 다가와 모자를 벗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여주었다. 어둠 속에 긴 금발의 작은 불꽃. 그는 모자 속에 감춰진 그의 긴 머리카락을 풀었다. 풀어진 머리카락은 그의 어깨 위로 내려 앉았다.

이제는 가야해. 오늘이 성요한절, 떠날 날이야. 창고에서 개썰매를 꺼내 갈테야. 그가 성요한제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녀는 생각한다. 너무 오래있었어. 이십 사년째야. 오늘이 떠나는 날이야. 거기, 창문 앞에, 창고에, 거기 불타오르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어째서 지금 불이, 그녀는 생각한다. 순간 성요한제의 불꽃이 창고에 들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성요한제의 불꽃이 있어야지. 그녀는 생각한다. 전혀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불이 훨씬 가깝다. 왜 우리 창고에. 개썰매가 창고에 있는데.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창고로 다가간다. 그리고 창고의 불을 처다본다. 어둠이 퍼지는 가운데 반짝이는 불꽃이 있다. 무거운 어둠속에 불이 보인다. 그 자신처럼 어둠은 무겁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어둠이 짙다. 오직 암흑, 검은 빛, 그리고 창고를 감싸고 있는 불꽃들. 이십 사년전에 보았던 불꽃이 여기에 있다.

 

남편이 물을 양동이에 들고 다가온다. 창고의 불을 끄러. 불을 끈다고? 성요한제의 불꽃인걸? 성요한제의 불은 꺼뜨려서는 안돼. 그녀는 멈춰서서 불을 끄러 분주한 남편을 바라본다. 그런 다음 불을 바라본다. 그런데 저기 불꽃 속, 저기 무슨 몸체 아닌가? 사람? 그녀는 생각난다. 불 한가운데 긴 금발이 보이고, 그다음 얼굴이, 이십 사년전 바라본 얼굴이, 그리고 타오르는 개썰매가 보인다. 회색과 검은색,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금발의 긴 머리도 불꽃에 쌓여 있다. 그리고 불꽃을 응시하고 있는 두 눈이 보인다. 그리고 두 눈 속의 무언가가 불꽃에 빨려 올라가, 연기가 되어 차가운 공기 속으로 소용돌이 친다. 눈은 보이지만 얼굴은 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리운 얼굴. 그리고 몸은 볼 수가 없다. 불꽃, 어둠 그리고 금발의 긴머리, 노란 불꽃, 불타오르는 창고가 보인다.

 

그가 왜 여기있지? 저 불꽃 속에? 뜨겁지 않은가? 성요한제의 불꽃이야. 왜 성스러운 불이 여기에? 그 남자야, 금발의. 그가 왜 여기에? 내 마음이 아파. 다가가고 싶어.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불꽃에 다가가 그남자 얼굴에 손을 뻗는다. 손이 따뜻해진다. 그에게 말을 걸꺼야. 할말이 많아. 건넬 말이 많아. 그에게 말하고 싶어. 내말이 들릴까? 소리지르고 싶어. 그가 들을 수 있도록. 그에게 말하고 싶어. 불을 끄던 남편이 황급히 올가를 뒤로 잡아 끈다. 차갑다. 올가의 몸을 잡아끄는 남편의 손이 차갑다. 불을 끄러 물을 던진 자리가 삽시간에 어두워진다. 그자리에 있었던 불꽃이 사라진다. 불꽃이 사라진 곳은 검게 변한다. 하지만 검음은 잠시 뿐, 이내 군데 군데 붉어지며 다시 불꽃이 그자리를 덮는다. 다시 태어난 불꽃 속에 금발의 남자 얼굴이 얼핏 다시 보인다. 얼핏 보인 그 남자의 얼굴이 보이자 왠지 올가는 안심이 된다.

 

갈수 없어. 이제 갈수 없어. 개썰매도 같이 불타고 있어. 오늘인데. 오늘 밤까지인데. 이제 곧 성요한제의 불이 붙을 텐데. 마음 속에 울부짖음이 들린다. 울부짖음은 위로 올라가는 불꽃과 하나가 되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는 불꽃과 하나가 되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외마디 비명소리가 짧게 허공으로 사라진다. 이제 갈수 없어. 오늘 못보면 십 이년 뒤에 갈 수 있어. 불타는 창고속에 불타는 개썰매 그리고 연기와 같이 올라가는 울부짖음. 그리고 눈 위로 날아가고, 볼 수 없는 연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검은 연기.

 

 

53세의 올가

그녀는 난로 앞에 앉아서 그가 쓰고 다닐 연노랑 모자를 짜고 있다. 얼마 전 남편이 늘 쓰고 있는 빨간 모자를 쓰고 집길을 내려가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자가 끔찍하게 흉하다고 생각했다. 흔들 거리는 술이 눈에 거슬렸다. 군데 군데 헤진 구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자를 차라리 쓰지 말았으면, 그녀는 빨간 모자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도 그는 그 빨간 모자를 쓰고 있다. 그녀는 이제 길어진 대신 숱이 좀 사라진 그의 검은 머리를 떠올리며, 난로에 앉아서, 난로의 불꽃을 들여다보며, 그녀의 손가락은 그가 입을 연노랑 모자를 짜고 있다.

 

남편이 모자를 만들어 달라고 한적은 없었다. 그는 한번도 그런 것을 요청한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 올해, 추위가 다시 엄습했다. 그리고 그에겐 쓸만한 모자가 없었다. 그가 젊을을 적부터 쓰고 다녔던, 술이 달린 오래된 빨간 벙거지 모자가 낡고 헤졌다. 세월이 가면 그런 것들은 점점 낡아져 버린다. 세월도 가버린다. 세월과 빨간 벙거지 모자는 헤져 사라져 간다. 그래서 그녀는 연노랑 모자를 짜고 있다. 거의 다 완성된 모자는, 크기도 적당하고 편안하고 따뜻할 것이다. 노랗고 하얀, 분명히 남편에게 잘 어울릴 것이다, 따뜻할 것이다. 거의 다 짰어, 거의 다 완성되었어. 오늘 밤 떠나기 전, 완성할 수 있어, 그녀는 생각했다.

 

난 결혼했지, 삽십 육년 전에, 미리 정해져 있는 관습에 따라. 그리고 그저 오래된 똑같은 관습에 따라 살고, 요리를 하고 집에서 지내지. 빨래를 하고, 난로를 피워, 늘 해왔던 대로 말이야,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는 고된 일을 마치고 소파에 누워있다. 누워있는 그는 무척 나이가 들고, 너무 힘이 없어 보인다. 그의 검은 머리는 군데 군데 많이도 세어 버렸다. 그녀는 마침내, 완성된 모자를 내려 놓고 그를 다시 쳐다 본다. 노랗고 하얀 모자를, 그녀가 그를 위해 직접 떠 줄 그 모자를 쓰고 있을 그를 상상해본다. 그러다가 소파를 바라보고, 거기 누워있는, 나이 들고 머리가 군데 군데 센 그를 쳐다 본다. 세삼스러울 것 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예전과는 무엇인가 다른 것 같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집 안을 둘러본다. 모든 것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그녀는 왜 무엇인가 달려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생각한다. 왜 무엇인가 달라져야 했을까? 그녀는 왜 그런 것을 생각하는 걸까? 왜 무엇인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생각한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그가 변했나? 그는 왜 그렇게 과묵해진 걸까? 하지만 지금, 그렇다, 그는 언제나 조용했다. 그녀는 생각한다. 사람들이 보통 그에 대해 말하기 좋아했던 것, 그는 이미 언제나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의 태도는 늘 그렇다. 그런 식이다.

 

그녀는 집 밖으로 나온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또 다시 십 이년이 지났다. 아직 덜 캄캄해진 지금, 아직 어둠이 오지 않은 지금, 그녀는 집 밖으로 나온다. 소파에 누워있던 남편이 어느덧 일어나 창가에 서서 그녀를 바라본다. 아직 술이 달린 빨간 모자를 쓰고 있다. 모자를 완성했는데, 노랗고 하얀 모자를 완성했는데, 탁자 위에 올려두었는데, 아직 말을 못했어. 술이 달린 빨간 모자를 쓰고 창 밖을 바라보는 그가 보인다. 그 사람이 창가에 있어.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떠나는 것을 눈치챘겠지. 생각하지 않았어도, 인정하기 싫었어도, 내가 떠나는 걸 이제는 어떻게든 알았을 테지. 그녀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창고로 가 개썰매를 꺼내다가 창고 문가에서 멈칫한다. 그리고 문득 그런 느낌이 든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어떤 목소리가 그녀를 부르는 것 같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다시 돌아가, 올가. 올가는 왠지 그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집으로 가서 잘 둘러보는게 좋을까? 모든게 제대로 있는지 어떤지. 하지만 대체 왜? 그녀는 생각한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하지만 집에는 예전과 무언가 다른게 있었다. 무엇이 달라졌지? 왜 그런 것을 생각했지? 집 안에는 어떤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누구 목소리지? 남편 목소리는 아닌데. 남편은 아직 집안 창가앞에 말없이 서 있는데.

멈칫하며 주저하는 올가를 보던 남편이 문을 열고 집에서 나온다. 아니야. 나오지마. 그녀가 마음 속으로 외친다. 내가 들은 건 당신 목소리가 아니었어. 나오지마. 나는 지금 당신을 떠나려는 거야. 그녀는 마음 속으로 외친다.

 

이거 가지고 가

 

말없이 옆에 다가온 남편은 여전히 빨간 모자를 쓴채 종이에 쌓여있는 것을 내밀었다. 곱게 접힌 종이는 급하게 접은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오늘 올가가 떠날 것을 예상한 것 같았다. 그래, 이 사람은 뭐든 대충하는 법이 없지. 미리 준비한 거야. 오늘을 위해. 고운 갈색 종이를 구해서, 정성스레 포장을 해두었어. 오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녀는 생각한다.

 

탁자 위에 새 모자를 떠 놓았어.

그래 봤어. 참 예쁜 모자야. 고마워.

이제 그 모자는 벗고 새모자를 써.

난 당신에게 준게 참 없는데. 우리 처음 만난 날 준 나무 십자가 목걸이 밖에 없는데.

 

아니야. 이건 당신이 준게 아니야. 올가는 손을 뻗어 목에 걸린 나무 십자가를 만지며 생각한다. 이 목걸이는 당신이 준게 아니야. 금발의 그가 주었어. 당신이 준 목걸이가 아니야. 거칠었던 나무 십자가는 어느새 그녀의 손에 닳아 반질반질하다.

 

매일 목에 걸고 있어줘서 고마워.

 

왜 이 목걸이를 자신이 주었다고 생각하지? 올가는 이제는 매끄러워진 나무 십자가를 만지작거린다. 이건 당신이 준 목걸이가 아니야. 당신한테 받은 건 없어. 이건 금발의 남자가 준 목걸이인걸. 성요한제의 뜨거웠던 하룻밤의 징표야. 금발의 남자가 나에게 주었어. 당신이 준게 아니야. 그리고 지금 그를 만나러 갈꺼야.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지며 별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가.

 

힘없이 당긴 고삐에 개들은 달려나간다. 썰매는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는 속도에 뒤로 젖혀진 올가는 나무 목걸이에서 손을 놓고 썰매를 잡는다. 썰매는 미끄러져 나간다. 그는 알고 있었어.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미리 준비해두었어.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남편이 준 종이 꾸러미를 옆자리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좀더 고삐를 단단히 잡고 당긴다. 썰매는 빨라진다. 하지만 너무 빠르지 않게. 지난 번 처럼 작은 돌덩이에 썰매가 전복되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하지만 답답하지 않게끔 충분히 빠르게.


마을이 빼꼼이 보이는 마지막 언덕에 금발의 남자가 서있다. 올가는 조용히 고삐를 당겨 썰매를 멈춘다.

 

늦지 않았어요. 기다렸나요?

십 이년 동안.

오늘이에요. 오늘은 시간 맞춰 왔어요. 드디어.

그래.

 

금발의 남자는 손을 내민다. 드디어 만났어. 나는 이제 나이들었는데. 오래 기다렸는데, 드디어 만났어. 금발의 남자가 내민 손을 잡고 올가는 썰매에서 내려온다. 내려오다 옷자락에 쓸린 종이 꾸러미가 썰매 발판으로 떨어진다. 올가는 남자의 손을 놓고 황급히 종이 꾸러미를 집어 올린다.

 

소중한 건가?

뭐가 들었는지도 몰라요. 군것질 거리나 그런거겠죠. 아마도.

 

그녀는 그런 것을 원했다. 종이 꾸러미에는 그런 것이 들어있기를 바란다. 하찮은 것. 잊혀져도 상관 없을 것을. 버려져도 괜찮을 것을. 종이 꾸러미 안에 그런 것이 들어 있기를. 제발 소중한 것이 들어있지는 않기를. 그녀는 간절히 바란다.

마을로 가자. 내려가면 이제 우리는 성요한제 불 앞에 함께 설 수 있어.

 

네. 그리고 우리는 같이 떠날 수 있겠죠.

 

종이꾸러미를 썰매에 놓고 갈까, 잠시 그녀는 생각했다. ‘난 당신에게 준게 참 없는데. 우리 처음 만난 날 준 나무 십자가 목걸이 밖에 없는데.’ 괜시리 남편이 말이 마음에 걸린다. 종이 꾸러미 속에는 나에게 주고 싶었던게 들어있을까? 나무 목걸이가 아닌 근사한 목걸이가 들어있을까? 마을에서 파는 제일 싸구려 목걸이도 이 삼년은 돈을 모아야 살수 있는데. 남편은 그걸 주려고 십 이년간 돈을 모은 걸까? 어째서 그걸 오늘에. 오늘이 올 걸 알고 있었으면 왜 마침내 오늘에야. 그녀는 나무 십자가를 만지작 거리며 생각한다. 나무 십자가는 누가 주었지?

 

돌아가야겠어요.

나와 같이 가려고 온게 아니었나.

그러려고 왔는데, 돌아가야겠어요.

 

그는 말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입김이 불빛을 흐릿하게 보이게 한다.

 

모자에 솔을 안달았어요. 그는 모자에 달린 솔을 참 좋아하는데. 바보같이. 솔을 안달고 마무리 했어요. 모자에 솔을 달아줘야해요. 그리고 난로에 장작도 넣어야하고. 불이 꺼지면 집이 추울거에요. 그리고 어두워지겠죠. 장작을 넣으러 가야겠어요.

당신은 늘 불에 대한 생각뿐이지.

 

그녀는 무엇인가 소리를 듣는다. 마을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거 아닌가? 그녀는 그제서야 생각한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는 마을 종탑 쪽을 내려다본다. 불이 올라온다. 성요한제의 불이. 불과 함께 조그만한 함성이 멀리서 들려온다. 불은 멀리서도 보인다. 하지만 불은 수십년 전만큼 그렇게 크지는 않다. 멀리서 볼때는 작은 나뭇가지가 타는 정도의 크기로 밖에 안보인다. 장작보다도 약하게. 바람이 불면 교회 종탑에 불꽃이 가리워져 어두워진다. 그리고 다시 타오른다.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잠깐만 보일 뿐이다. 그런 다음 어둡다. 바람에 성요한제의 불꽃이 교회 종탑에 가리워질 때마다 올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진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오래된 집으로 가서 난로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로가 꺼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그들의 오래된 집, 아름답고 오래된 방은 따뜻해야 한다, 그녀는 생각한다. 이제 그녀는 집에 가야 한다. 그리고 불을 피워야 한다, 그녀는 생각한다.

 

가야해요.

다시 기다리겠어.

십 이년을?

그래, 십 이년.

다시 올께요.

 

올가는 종이 꾸러미를 소중이 안고 썰매위에 올라탄다. 뒤를 돌아 금발의 머리를 한번, 성요한제의 불꽃을 한번 처다본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고삐를 당긴다. 이제 집으로 가야한다.

 

 

65세 또는 77세의 올가

그녀는 익숙한 것들, 잔 상처 가득한 오래된 탁자, 옷가지를 넣어둔 옷장 상자, 거친 통나무 의자, 오래된 벽난로를 바라본다. 오랫동안 만지며, 사용하면서도 시선을 주지 않았던 집안 물건들을 하나씩 바라본다. 모든 것이 늘 똑같은 자리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다르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가 죽은 이후 무엇 하나 새로 생긴 것은 없다. 그녀는 여기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여기 오래된 물건들과 같이 있을 뿐, 날들이 오고, 날들이 간다. 밤이 오고, 밤이 간다. 그리고 그녀는 무언가 특별하거나 별다른 것 없이 느린 모습으로 같이 오래되어진다.

 

남편은 죽었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냥 죽어서 내 옆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홀로 남았다. 그들에겐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와 남편, 항상 둘 뿐이었다. 그녀와 남편, 그녀는 생각한다. 그는 여기에 있었다. 그들은 긴 시간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끌렸던가?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함께 살았다, 그와 함께 머물렀다. 긴 세월이었다. 사십 팔년? 그 정도 긴 세월이었던가. 그녀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다음, 그렇게 갑자기, 그는 사라져 버렸다.

 

그녀와 남편은 여기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떠났다, 사라졌다. 지금은 그녀만 여기에 있다. 그녀는 그를 한번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오직 그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검고, 짧은 머리를 하고 그녀에게 곧장 다가왔다. 결혼은 정해져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그를 선택한 적이 없다. 그런 다음 그들은 긴 시간을 함께 살았다. 그와 함께 머물렀다. 긴 세월이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만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런 다음, 그렇게 갑자기, 그가 그녀에게 왔던 것처럼, 그는 홀로 떠나 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아무도 찾아온 적은 없다.

 

그녀는 그가 자주 서있었던 창가에 서서 어둠을 바라본다. 그가 죽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렇게 나를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너무 평온해 올가는 남편이 낮잠을 자려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그가 죽은 줄도 모르고 한참을 부엌 일을 했었다. 그는 죽을 때 무슨 말을 했었나? 그때 무슨 말을 했던가? 아마도 장작을 하나 넣어달라고? 내일은 날씨가 좋을 것 같다고? 빗물 통을 손봐야겠다고? 그가 늘 말하던 평범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런 식으로, 늘 그렇듯이, 중요하지 않은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는 말이 많지 않았다. 늘 과묵했다. 평소에 자주 했던, 그 사람이 늘 하던 전혀 중요치 않은 그런 말들, 그는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생각한다.

 

창 밖은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단 한번도 무언가가 보인적이 없다. 창밖에는 칠흙같은 어둠만이 펼쳐져 있다. 난로에서 따닥 소리를 내며 장작이 타오른다. 창문에 난로가 비친다. 여전히 보이는 어둠 그리고 금발의 긴머리, 노란 불꽃, 불타는 장작이 보인다. 금발의 그가 걸어오고 있다. 장작이 타는 소리였는데. 금발의 그가 눈을 밟는 소리였나? 그녀는 생각한다. 금발의 남자는 천천히 멈추지 않고 걸어온다. 올가는 그 남자처럼 천천히 문으로 다다가 문을 연다. 그 남자가 따뜻한 집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벌써 12년이 지났나요.

아니 24년이야. 지난번에는 오지 않더군. 이번엔 내가 찾아왔어.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처음 본 그날과 똑같아요. 당신은 이세상 사람이 아니군요.

 

그녀는 처음 그들이 만난 날을 떠올린다. 춤추는 듯한 발걸음, 낯설지만 그리운 얼굴, 환한 빛이 나는 금발의 머리카락. 그의 모습은 그때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당신은 사신인가요? 나를 데려가러 온건가요?

아니 그런건 없어. 있어도 난 아니야. 누굴 죽일 능력도 없는 걸.

하지만 너무 추운걸요. 나를 데려가려 왔잖아요.

 

몸이 얼어온다. 너무 추워 난로 옆으로 가고 싶다. 우리 집은 오래됐지만 따뜻한데. 그녀는 생각한다. 유난히 추운 겨울에도 항상 우리 집은 난로를 피울 수 있게 장작이 충분했다.

 

그들의 집은 오래되었지만 그 오래된 집은 따뜻하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좋은 난로가 있다. 그들은 그 난로를 겨울 내내 피워둔다. 장작이 부족한 적은 없었다. 여름이 되면 그는 늘 나무를 한껏 가져왔다. 가을에는 쌓아둔 나무를 적당히 톱으로 자르고 쪼개서 잘 마를 수 있도록 쌓아두었다. 장작은 충분했다. 여름이 되면, 가을이 되면. 그래, 장작이 충분하니 따뜻하게 지낼 수 있어. 그는 떠나기 전에도 장작을 충분히 마련해두었다.

 

이번 겨울을 유난히 추워 장작이 부족했어요

 

그런 다른 사람의 푸념은 낯설다. 그들의 집에는 장작이 부족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항상 불을 피울 수 있도록 그는 장작을 여름부터 마련해 두었다. 유난히 추운 겨울에도 충분히 불을 피울 수 있도록. 그래서 그들의 오래된 집은 따뜻했다.

 

데려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러왔어.

어디로? 날 죽이는게 아니라면 어디로 데려갈꺼죠? 하지만 너무 추워요

난로 앞으로가, 난로에 불이 멋지게 타고 있어.

 

그녀는 난로 앞으로 간다. 그리고 난로 앞에 서서 불꽃을 들여다 본다. 금발의 그가 다가와 장작을 새로 하나 난로에 넣는다. 그녀는 장작을 바라본다. 불꽃이 장작을 감싸고 모여들어 불이 붙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마침내, 장작은 불꽃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전 여기 있고 싶어요. 나는 선택할 수 있나요?

언제나 당신의 선택이었어.

 

그녀는 난로 앞에 서서 불꽃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창문을 바라본다. 창문에 비쳐 어른 거리는 불꽃을 바라본다. 창 밖의 어둠이 섞여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과 쌓인 눈 사이에 반짝 빛나는 불꽃을 바라본다. 난로 속의 장작 하나가 바스락 부서지며 불똥들이 솓아 오른다. 펄썩 튀어 오르는 수많은 불똥들이 창밖의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간다. 그녀는 난로 앞에 남기로 선택한다. 난로 앞은 따뜻하다. 그들의 오래된 집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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